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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1950년 추석의 기억 :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 작성자강수경
  • 작성일시2023-10-17 10:22
  • 조회수10

[선데이 칼럼] 1950년 추석의 기억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그해 여름은 특별히 길었다. 농민들에게 여름이란 늘 길고 긴 고된 시간이지만 그해에는 특별히 그랬다. 멀리서 간혹 들리는 전쟁의 소식은 마을에 늦게 전해졌다. 대개는 간간이 찾아오는 뜬 소문들 정도였고 멀리서 들리다 점차로 가까이 다가오는 포성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눈앞의 현실이 됐다. 그것은 마을을 뒤흔드는 큰 폭발음과 뒤이어 하나둘 나타나는 낯선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나이가 어려 보였고, 지쳤지만 씩씩했으며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새로운 모습의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전쟁 이후 여름 동안 엄청난 변화
추석 닥쳐오자 갑자기 축제 분위기
주변의 살육과 파괴는 애써 무시
명절의 의미 새롭게 깨달은 것 같아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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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의 생각이지만, 주민들은 오랜 세월 ‘새 세상’을 너무 많이 겪어 왔던 것이다. 이분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새 세상’이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큰 소란과 함께 닥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상상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새 세상’을 일으켜서 한세월을 휩쓸다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물론 변화도 있었다. 인민군이 들어온 지 사흘 만에 ‘정치 공작대’라는 사람 서너 명이 마을에 와서 인민위원회, 치안대, 여성동맹 등을 조직했다. 학교를 열어 우리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이 전쟁에 관해 시사강연을 해 주었다. 모두 재미있어했다. 인민재판도 처형도 있었지만 별 큰 사건은 아니었다. 몇 안 되는 ‘반동분자’들은 진작 경찰들과 함께 달아나고 없었다. 기껏해야 월남해서 어찌어찌 인연을 찾아 이 마을까지 흘러와서는, 배운 재주의 전부인 소주 내리는 기술로 술도가를 하던 사람을 인민재판에 회부해 밤중에 처형한 정도였다.

가장 활기를 띤 것은 여성동맹이었다. 집안에만 갇혀 살던 여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위원장과 간부들을 뽑고 공적인 일들을 토의하고 실행하는 일들에 열성이었다. 반면에 남자들 특히 연세 드신 어른들은 이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조금 불안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새로운 세금 계산 방식이었다. 즉 논의 벼 낟알 수를 세어 그에 따라  세금을 매긴다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새 세상’의 엄청난 변화는 엉뚱한 곳, 하늘에서 왔다. 비행기들이었다. 멀리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비행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가깝게 찾아와서 엄청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무서운 불을 퍼붓고는 나 모른다는 식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거의 일상처럼 되풀이됐다.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어떻게 귀신처럼 알아냈는지 둘씩 혹은 넷씩 짝을 이루어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고 사라지곤 하였다. 인민군들은 주로 면 소재지 학교나 지서, 면사무소 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민가가 직접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오폭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논에 갈 때 지게를 지지 말라는 말들을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총을 메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도 농사는 지어야 했다. 모두가 한 해 농사로 한 해를 사는 사람들이었다.

점차 비행기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가 닥쳤다. 인민군은 필요한 물자 보급을 지역민의 현지 조달로 해결하려 했다. 최전선으로 가는 급식 마련부터 군수품의 수송이나 피 묻은 군복의 세탁, 부상병의 간병에 이르는 여러 가지 일이 모두 부락민의 부담으로 떨어졌다. 소 한 마리를 징발해 도살하면 장조림 등을 만들어 동이에 넣고 이를 지게에 지거나 우차에 싣고 전선까지 운반하는 일들이 모두 현지인들의 부담으로 됐다. 물론 징발하는 가축이나 식품들에 대해서는 증명서를 발부하고 후일 충분히 배상해 주겠다는 약속이 뒤따랐지만 이것을 믿고 순순히 응하는 사람은 점점 더 드물게 됐다.

주민들의 짜증과 기피 그리고 저항과 함께 인민군은 더 위압적으로 되고 주민을 대하는 태도도 살벌해져 갔다. 급식을 기다리며 지쳐 쉬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개 한 마리가 짖자 병사는 앉은 채 총을 들어 사살하는 광경도 있었다. 영양실조로 머리칼이 노랗게 변색한 아동을 향해 “양키 새끼”라며 권총을 겨눈 장교도 있었다. 이래저래 그해 여름은 농민들에게는 지옥 같은 현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길고 긴 여름의 끝자락에 추석이 닥쳐오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을은 느닷없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마을은 온통 부침개 같은 음식 냄새에 휩싸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어떻게 마련한 것인지 모를 온갖 먹거리들을 조상님에 바치고 이웃들과 나누면서 주변의 살육과 파괴는 애써 무시하는 것이었다. 때맞춰 자연은 풍성한 선물을 마련하고 있었다. 감·밤·머루·다래·송이…. 이때 처음 명절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은 것 같았다. 농민들은 축제를 통해 자신들이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고 후계자임을 확인하고 주위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수백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권력자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삶을 영위해 온 주민들의 끈질긴 생명력의 시위와도 같았다.

그렇게 추석이 지난 며칠 후 미군이 마을에 들어왔다. 또 하나의 ‘새 세상’이 온 것이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기사원문[선데이 칼럼] 1950년 추석의 기억 | 중앙일보 (joongang.co.kr)